1. 600년 고도의 심장에 서다

2023. 2. 1. 07:50서울-부산 사람길 국토종단기/수도권, 서울~여주

 

비 내리던 아침

   모두들 일찍 와 있다. 2023년 1월 14일 주말 아침 8시, 경복궁역 5번 출구 안쪽은 시간 전부터 비장함으로 똘똘 뭉친 단원들의 열기로 달아오르고 있었다. 열기를 식히기라도 하듯 출구 밖은 이슬비가 소리 없이 내리고 있다.

   출발일 아침에 때 맞춰 내리는 비가 상서롭다. 오랜 농경사회에서 비는 작물을 키우고 만물을 소생시키는 생명수와 같았다. 가뭄이 들면 왕이 직접 사직단에 나가 기우제를 올릴 만큼 예로부터 비는 소중한 단비의 이미지를 가졌다. 기독교의 성경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이른 비, 늦은 비로 때에 맞춰 비를 내려 땅이 소산을 내게 하고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과 육축을 먹을 수 있게 한다고 전한다. 즉 비는 축복과 연결돼 있다. 오늘 국토종주단이 축복 속에 첫출발을 할 수 있게 된 것만 같다.

   아침을 안 먹은 단원들을 위해 은주 님이 만들어온 샌드위치를 정신없이 먹는 사이에 비가 잦아든다. 그러고보니 2019년 해남-고성 사람길 국토종주 때도 이른 아침까지만 딱 이렇게 비가 왔었다. 신기하다.

   국립고궁박물관 마당에 나가 배낭에 국토종주단 깃발을 처음 다는데 갑자기 설렘이 인다. 이 깃발은 단순한 표시 이상의 의미가 있다. 소중한 우리 국토의 재발견을 위한 순례자로서, 사람길 국토종주길의 개척자로서, 앞으로 가는 곳마다 만나게 될 이 땅과 지역민을 대할 명함으로서 책임감이 조용히 깃발을 달던 손을 타고 마음으로 전해온다.

기나긴 서울-부산 대장정에 나서며 기념촬영

 

때마다 되살아나는 힘이 되기를

   앞으로 1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우리 국토의 속살로 들어가 서울에서 부산까지 행군할 것이다. 이번 국토종주는 조선통신사길 복원의 뜻이 더해져 선조들의 체취를 맡고 후대에 남긴 뜻과 기대를 재발견하는 길이다.

   그러나 국토는 시대의 필요를 담아 시시때때로 변하는 생물과 같아서 특정 장소 외에 대부분의 길은 미지의 길이다. 우리의 여정은 찻길인 국도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람길을 여는 국토종주이다. 정해지지 않은 미지의 길이고 개척의 길이다. 앞으로 1년 간 우리가 어떤 일을 겪을지, 무엇을 만날지  지금으로선 알 수 없다.

   단원 각자의 신앙이 다르겠지만 우리 모두의 기원은 하나이다. 난 소리 높여 단원 모두의 기도가 되도록 사람길 국토종주 비나리를 읽어 내려갔다.

 

출발에 앞서 비나리 의식을 진행하고 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두 손 모아 촛불 밝혀 놓고

엎드리고 또 엎드려

간절하게 비나이다.

 

이 땅 이 나라를 주재하시는

천지신께 비나이다.

한 줄기 바람의 방향도 정하시는

하늘신께 비나이다.

지금 우리를 이곳에 있게 하신

당신 앞에 엎드려 비나이다.

간절하게 비나이다.

 

이제 저희의 작은 두 발로

이 땅을 딛고

한걸음 한걸음 옮기며,

걸음걸음마다

우리 국토를 마음에 새기며,

땅끝까지 남김없이 걸어가려 하옵나니

 

부디 어여삐 봐주시고

기특하다 봐주시어

가는 길을 흔쾌히 허락하여 주시기를 비나이다.

정성 다해 비나이다.

 

밟는 걸음마다 다리 튼튼히 보호하시어

힘든 길 먼 길에 힘이 부칠 지라도

관절 마디마다 어루만져 주시고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살뜰하게

보호해 주시기를 비나이다.

 

고단한 몸 쉴 잠자리도 봐주시고

모르는 길 낯선 길에 설지라도

가야 할 길 잃지 않게 해 주시기를 비나이다.

 

단원 중에 누구도 도중에 탈 나지 않기를

마치는 날까지 무사히 몸성히

털끝 하나까지 살펴 주시기를 비나이다.

 

만나는 인연마다 행복을 나누게 하시고

이 땅의 가르침을

이 땅의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저희도 같이 느끼고 배우게 하옵소서.

 

이 모든 경험들을 잊지 않고 마음 깊이 새겨서

이 땅의 자손 됨을 긍지로 여기고

전보다 성숙한 몸과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게 하옵소서.

 

저희의 사람길 국토대장정이

우리를 아는 모든 이에게도

또 세상에도 득이 되는 걸음이 되도록

뜻이 있는 길을 열어 주옵소서.

때마다 발길 닿는 곳마다 살펴보아 주옵소서.

 

지금 아뢴 모든 것을 간절히 비나이다.

정성 다해 비나이다.

 

   기원문이기 전에 각자 자신을 다잡는 각오가 되었다. 앞으로 내딛는 곳마다 발걸음마다 지금 이 기원이 가는 길을 훤히 비추는 빛이 되길, 가다가 힘들어도, 길 길 몰라 헤메일 때도 때마다 되살아나는 힘이 되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경복궁 내 국립고궁박물관 앞에서 1일차 출발식